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크 록 (문단 편집) ==== CBGB의 탄생 ==== 1973년, [[뉴욕시]] [[맨해튼]]의 빈민가인 바워리(Bowery)에 새로운 클럽이 하나 등장했다. 이 클럽은 원래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을 무대에 올리는 작은 클럽이었는데, 어느날 한 젊은이가 공연을 하고자 연락을 해왔다. 이 젊은이가 이끄는 밴드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이 밴드가 맘에 든 클럽 오너 힐리 크리스탈은 매주 일요일에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톰 벌레인이었고, 이들이 바로 [[텔레비전(밴드)|텔레비전]]이다. 그리고 대충 비슷한 시기에 시인이자 칼럼니스트인 한 여성이 이끄는 밴드 역시 CBGB의 무대에 서게 된다. 이들은 록 역사상 최초로 음유시와 록 음악을 결합한 밴드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패티 스미스]]가 이끄는 패티 스미스 밴드였다. 뒤를 이어 등장한 밴드들 역시 록 음악 역사에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기는 밴드들이었다. 애초에 스틸레토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밴드는 [[Blondie(밴드)|블론디]]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고, 가죽 재킷을 걸치고 연주를 지지리도 못하던 네명의 젊은이들이 만든 밴드는 [[라몬즈]]였고, 좀 찐따같아 보이지만 매우 독특한 연주를 하는 세명의 젊은이들이 모인 밴드 이름은 [[토킹 헤즈]]였고, 아무리 봐도 뒷골목 불량배에 지나지 않는 다섯 젊은이들이 모인 밴드는 데드 보이즈였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밴드들이 뒤를 이어 등장했다. 그런데 사실 CBGB는 원래 펑크록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클럽이었다. CBGB의 원래 이름은 Country Bluegrass Blues and Other Music For Uplifting Gormandizers였다. 직역하면 "떠오르는 음악 잡식가들을 위한 [[컨트리]], [[블루그래스]]와 다른 음악들"정도.[* 원래 1970년대의 펑크록이 대부분 [[블루스]]나 [[컨트리]], 1950~60년대의 [[로큰롤]]을 하드록적인 방식(뉴욕 돌즈,[[섹스 피스톨즈]], [[라몬즈]], [[더 클래시]])이나 전위적인 방식([[텔레비전]])으로 연주한 것이다.] [[패티 스미스]], [[텔레비전(밴드)|텔레비전]]등은 예술적인 펑크를 추구해 후일 1980년대부터 시작되는 [[인디 록]]의 흐름을 선취했다. 이런 예술적 펑크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그룹은 다름아닌 [[R.E.M.]]이다. CBGB에 있던 밴드들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이쯤 되어서야 정식으로 록 평론가들 사이에서 "펑크 록"이란 장르가 하나의 확립된 장르로 받아들여졌고, 펑크 자체가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 뉴욕에는 뉴욕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는 록 음악이 별로 없었다. 뉴욕은 오로지 재즈와 포크 음악의 고향이었고, 미국의 록 밴드들은 1960년대 후반 내내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는 [[히피]] 문화의 중심지가 샌프란시스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는 [[글램 록]]의 부흥으로 영국과 미국이 록 음악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뉴욕에서 뉴욕만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는 음악이 등장하자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은 환호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사실 세계 최초의 펑크 [[팬진]]인 "PUNK"도 이 시기 뉴욕에서 발행되었다.[* 그래서인지 팬진 "PUNK"의 발행인 중 한명이었던 렉스 맥닐은 훗날 런던펑크를 엄청나게 씹어댄다. 맥닐은 다큐멘터리에 나올때마다 "우리가 X빠지게 공들여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준비해놨더니, 영국놈들이 가져가서 락스타 음악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섹스 피스톨즈]] 이전 밴드들은 완전히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렸다."라거나, "사실 나는 그때 이런 괴상한 음악을 한다고 엄마한테 말을 못했다. 자연히 부모님은 내가 직업없는 백수인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와서 나는 내가 이런 무브먼트의 한 축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한테 전화로 '엄마 그때 펑크 무브먼트 그거 내가 잡지만들고 그랬잖아'라고 하면 엄마는 '얘, 그거 영국 사람들이 하던거 아니니?'라고 하신다. 아이고 어무이..."라고 했다.] 당시 바워리라는 장소의 특성도 음악의 형성에 한몫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밴드)|텔레비전]]의 베이시스트였던 [[리처드 헬]]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에 CBGB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은 대부분 근처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스트리퍼나 마약쟁이, 포주, 불량배 같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뉴욕 펑크는 확실한 한계가 있었다. 패티 스미스와 텔레비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지나치게 예술적이고 과격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대중과의 거리가 너무 컸다는 것. 게다가 미국은 여러모로 영국이나 유럽보다 [[보수주의|보수]]적인 국가였다. 물론 미국 사회 내부는 마약이나 총기 문제로 병들어가고 있었지만,[*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이러한 1970년대 후반의 미국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 대중매체는 오로지 반듯하고 정화된 음악만을 공급하려 노력했고, 각 지역의 프로모터들 또한 대중의 취향에 맞는 "좋은 음악"만을 공급하려고 했다. 또한 1960년대의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과격하거나 외설의혹이 있는 공연은 어김없이 경찰관 입회 하에 진행되었다.[* [[더 도어즈]]의 짐 모리슨은 이러한 상황을 하도 많이 겪다가 '''빡치는''' 바람에 공연 중 [[검열삭제]]를 꺼냈다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체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꺼냈는지 안꺼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에서 펑크록은 분명 언더그라운드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음악이 후대까지 계속 전해지고 발전되려면 적어도 대중들이 들었을때 이름을 딱 알아차릴 스타급 밴드가 한두개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거 없다|그런게 없었다.]] 라몬즈는 차트 바닥을 기었으며 텔레비전은 영국에서 인기를 얻으려는 찰나 해체했고, 패티 스미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협업한 'Because the Night'가 히트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직후 결혼한 뒤 은퇴해버렸다. (그나마다 1980년대 말에 복귀했다.) 토킹 헤즈는 해체하지 않고 비교적 오래갔으나 음악이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컬트적 인기에 머물렀다. 그나마 [[블론디(밴드)|블론디]]가 뉴웨이브와 디스코를 결합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고작 4년 밖에 가지 못했다. 데드 보이즈는 차트는커녕 3년만에 해체했다. 게다가 미국은 실제로는 굉장히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중산층]]의 [[아메리칸 드림]]이 있는 나라였고, 1960년대의 사회갈등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상황이었다.[* [[베트남전]]도 끝나가고 있었고, 더 이상 대규모의 민중항쟁도 없었다. 일종의 [[디스토피아]]같은 분위기만 대도시에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일쇼크]]까지 겹쳤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디스코]]를 찾았다. 뉴욕 펑크는 세상에 뛰어 나오기 전에 넘어야 할 진입장벽이 너무나도 높았던 것. 그리고 가장 큰 문제로는 생각 외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서브컬쳐]]가 [[히피]]가 거의 대부분이었고(아직 1970년대) 영국은 테디보이 정도가 어느 정도 나대고 있었다. 결국 바통은 [[런던]]으로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